영화 2012 포스터

지금껏 나온 영화와는 스케일의 규모가 다른 예고편을 보고, 내용에 상관없이 이건 한번은 극장에서 봐야 겠구나 하고 개봉하자마자 보러갔었던 영화 2012.  

그날 아침부터 독감의 역습이 시작됐는데, 머리아프고 소화 안된다고만 생각하다가 영화보고 집에 와서 며칠간 시체놀이 하느라고 뒤늦게 쓴 후기.

영화 본 감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엄청나게 지루했다.

감기 기운도 있긴 했지만 솔직히 중간중간 깜빡 졸기까지 했다.

이런 엄청난 스펙타클을 눈 앞에 두고 졸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장장 두시간 반에 걸친 상영시간 때문에 보고 나올때쯤엔 체력적으로 완전히 떡실신.

물론 감독이 감독인지라 대재앙 시뮬레이션을 큰 화면으로 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가긴 했다.

롤랜드 에머리히가 누구냐....드라마하고는 담 쌓은 걸로 유명한 감독 아닌가.

고질라 개봉 때 대놓고 포스터에 써갈길 정도로 그의 영화관은 명확하다.

'중요한 건 크기다!!' 


스타게이트, 인디펜던스 데이를 보고 연타로 실망해서 이 사람 영화는 그냥 디스커버리 채널을 보는 마음으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투머로우는 드라마와 액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데다 메시지까지 있는 나름의 수작이라 '오오, 이 아저씨도 발전이라는 걸 하는구나' 생각하며, 2012도 투머로우의 연장선상에 있다면 그럭저럭 드라마도 봐줄만 할거라는 기대를 쬐끔은 했었는데...전혀 아니었다. 


영화 2012 스틸컷 1

이 영화의 유일한 미덕은 지금까지 나온 대재앙 영화를 총정리한 종합선물세트라는데 있다.

지반 대붕괴, 화산 대폭발, 대륙이동, 지구를 뒤덮는 스케일의 초대형 쓰나미 등등...

그걸 묘사한 화면도 죽여준다.

정말이지 화면에 돈칠한게 눈에 보일 정도의 CG다.

올해 초에 봤던 눈이 썩는듯한 게임화면의 3류 뮤비같은 T4 보다는 눈요기면에서 백만배는 우위이긴 했다. 

평생 작가 소리는 못들을 감독이긴 하지만, 스펙타클의 묘사에 있어서 만큼은 어느 감독에게도 안 꿇린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 2012 스틸컷 4


그러나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이 지나친 재앙 종합선물세트도 중반이 넘어가면 영화에 독이 된다.

영화 초반 LA 대붕괴 장면은 정말 최고였다.

그 장면이 이 영화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 하다. 

잘못된 각도에서 찍었다면 대략 폭망일수도 있었을 장면을, 시각을 자동차와 경비행기로 바꿔가면서 점층적인 방법으로 스케일을 확대해간 방법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들 정도로 멋지다. 

그런데 LA 붕괴 장면이 워낙 충격적이고 스케일이 크다보니 그 이후 반복되는 다른 종류의 재앙은 점점 시큰둥해진다.

쓰나미가 백악관을 덮치는 장면은 투모로우에서보다 훨씬 퀄리티가 떨어졌다.

옐로우스톤 화산폭발 장면은 말도 안되는 비행기 탈출과 겹쳐서 무슨 만화 보는 기분이 들 정도. 

결과적으로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할 영화 종반부 쓰나미가 방주를 덮치는 장면에서는 긴박감이 바닥을 치고, 안 그래도 부실한 드라마를 더 좀먹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영화 2012 스틸컷 2


배우들은 워낙 지명도와 기본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연기면에서는 구멍이 없다.

문제는 대재앙이 주인공이라, 배우들이 주는 존재감과 감동은 전부 실종됐다는데 있었다. 

미국 영화의 고질적인 병폐인 가족주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징하게 강조하는게 지루함을 더했다. 

그리고 인간관계는 일부만 부각시킬 것이지, 이 사람 저사람 다 엮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고, 화면에서는 생이별한다고 눈물흘리는데 관객들의 얼굴은 뽀송뽀송한 상태가 되는 사태발생.

감정 이입이 정말 하나도 안된다.  

영화 후반에 애드리언이 감동적인 연설을 하긴 하는데, 그 감동은 영화 내부에서만 메아리칠뿐, 스크린 밖으로 나와 관객들에게 전달되지는 못한다.

솔직히 지구인 태반을 죽도록 방치하고나서 거기 있는 한 줌의 사람 구하자고 연설하는데 감동이 느껴질 수가 있나?


그래도 내용상 장점을 좀 찾아보자면,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 미국 대통령이었던 인디펜던스 데이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최소한 미국인 한 사람이 지구와 전 인류를 구한다는 말도 안되는 설정은 없다.

그리고 주인공이 자기 가족만 살리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차라리 인간적이라 보기가 편했다. 

솔직히 그렇게 긴박한 상황이 되면 사람의 생존본능상 자기 목숨 건지려고 아둥바둥하지, 그 와중에 희생정신 발휘하며 영웅놀이 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국 영화치고 많이 겸손해지고, 솔직해지긴 했다. 


영화 2012 스틸컷 3


그 외 잡다한 감상.

이 영화에서 건진 영국배우 치웨텔 에지오포.

배우로서의 매력과 참신함이 느껴져서, 주인공인 존 큐잭보다 이 사람이 더 인상적이었다.

느낌은 좀 다르지만, Commander in Chief의 해리 레닉스를 연상시켜서 더 호감.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러시아인 갑부 유리. 

속물에다 황금만능주의에, 크리티컬한 상황에서 초 비열한 모습을 보이지만, 인간적인 면도 있고, 마지막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던진다.

에머리히 영화에서 보기 드문, 개성있고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입체적인 캐릭터라 기억에 남는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든 생각.

'이 감독 다음엔 대체 무슨 영화를 만들건가?' 

지구를 다 때려 부쉈으니 다음은 태양계를 박살내는 영화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2009-11-26 작성]